글/SS
눈 가리고 아웅
서양씹선비
2015. 8. 13. 00:01
" 가지 마. "
등 뒤로 녀석이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. 목소리는 다소 애원조일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무덤덤하다. 심하면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 줄 알았는데, 저렇게 냉정할 줄은 몰라서 심기가 뒤틀린다. 짜증이 난다. 저 놈은 언제나 내 아래라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그런가, 과연 너 따위가 내게 구걸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? 같은 가소로운 생각이 든다. 하등한 새끼, 감히 네가 나를 붙잡아?
" 왜 내가 가지 말아야 하는데? "
그렇다면 어디 한 번 대답해 보시지.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도 있고, 폭력을 가할 수도 있지만,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. 구차한 사랑에 매달릴 뿐인 네가 나한테 막말을 할 수 있을까?
더군다나 나는 너같은 건 이제 질려버렸고 남은 건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하는 넌데, 어째서 내가 굳이 네 곁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?
물론 너를 위해 헌신하는 나에게 보답하려고 남아 있으라는 심리도 있겠지만, 그건 내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잖아? 어디까지나 네 욕심이고, 나는 그 욕심에 갇히기 싫은걸.
내가 언제까지 가식을 떨어야 하는거야? 자, 얼른 대답해 보라니까? ...하고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할 때 쯤,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.
" 내가 죽을 거니까. "
냉정한 목소리가 귓구녕을 찔렀다. 아니, 저건 체념한 건가? 하여튼 어쨌고 자시고 그저 가소롭기만 하다. 네가 죽어? 내가 가면? 오, 하하. 세상에. 이런 멍청한 놈. 굳이 내가 고개 안 돌려도 알 것 같다. 저 놈은 지금 틀림없이, 부들부들 거리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내리누른 채 샷건의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있을 것이다! 맙소사, 이 와중에도 허세를 부리다니. 정말 우습다. 끊임없이 비웃어주고 코웃음을 치고 싶다! 어디 할테면 해보라지, 멍청한 새끼. 실소가 절로 나오는구나.
" 그럼 뒤지시던가. "
웃음을 간신히 참느라 목소리가 웃기게 나왔지만 신경쓸 바 아니다. 나는 그대로 웃음을 참으면서 저 보이는 문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. 아, 너무너무 뿌듯하다. 허구한 날 허세나 부리고 거짓말을 흩뿌리고 다니는 허언증 환자를 꺾어버렸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! 그래, 그럼 어디 한 번 뒤져보라지. 속 시원하게! 꼴 좋다! 너는 절대로 죽지 못해. 절대로!
자, 이제 문까지 얼마 안 남았다. 내가 문을 닫는 중에도 녀석은 총을 쏘지 못할 것이다. 거짓말쟁이니까! 쭈욱 조용할 것이다!
그렇게 비웃으며 세 걸음 정도 나아가자 귀를 찢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.
놀라서 뒤돌아봤을 때 녀석은 이미 바닥에 나동그라진 후였다.
진짜 죽은 것이다.